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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활수기공모(당선작)

제1회 [최우수] 지구를 살림 (신혜진) 제1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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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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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수능성적이 그즈음이었다. 고만고만한 학교와 학과 중에 당시 가장 나은 선택이었기에 엄청난 고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환경교육과에 진학했다. 전국의 고3 수험생 중 미래에 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학생은 얼마나 될까. 시키는대로 공부했고, 적당히 농땡이 쳤으며, 성실하게 대성학원 배치표와 내 성적을 일치시켰다. 그리고 나는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양심 정도만 가지고 환경학에 입문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과긴 했다. 재능은 하나도 없었지만 장래희망을 적을 때면 과학자 따위를 당당하게 쓴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이과였다. 환경을 철학적으로 접근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온통 화학과 생물이었다. 알게 뭐람. 표면적으로 근면성실했던 고등학생은 표면적으로도 공부와는 담을 쌓는 대학생이 되었다. 관심도 재주도 없던 나는 성적마저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소질 없는 대학생활은 학사경고 한 번으로 겨우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렇게 어영부영 학사모를 썼다.

알은체를 해댔다. 전공자들 앞에서는 딱딱하게 굳어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못 꺼낼 세치 혀가 비전공자들, 특히 우리 가족들 앞에서는 버터 바른 듯이 굴러갔다. 버려지는 쓰레기들을 지적해가며 이건 음식물쓰레기고, 이건 일반쓰레기고 하는 것들 말이다. 달걀껍질이 음식물쓰레기와 섞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4년간 콩고물이라도 뭍은 얄팍한 지식은 쓰일 데가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도 바가지는 샜다. 타인의 손에서 길바닥에 떨어지는 쓰레기라도 있는 날엔 세상 환경보호가인 척이었다. 고상하게 내가 전공이 그렇다는 것도 덧붙였다.

위선자는 언젠가 실체가 들통난다. 똑똑한 척하던 전공자는 지구에 발을 붙인 영웅에 어퍼컷을 맞았다. 그 영웅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다. 아주 친밀한 자세로 쇼파에 누워 리모컨을 까딱거리면서 말이다. 우리집 주부9단은 어설픈 이론으로 무장한 환경보호론자보다는 훨씬 지구에 이로운 인물이었다. 똑똑한 척하는 이론가가 쓰레기를 잘 분리수거해 버리는 것을 선택할 때 주부9단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그 덕에 집에는 다시 한번 간택을 기다리는 보물을 가장한 쓰레기들이 넘쳐났다. 누군가의 눈엔 보물이고, 누군가의 눈엔 쓰레기였다.

자주 짐을 꾸렸다. 여행을 좋아하기도 했고, 이사를 즐겨하기도 했다. 짐을 쌌다가 풀고, 다시 쌌다. 그 과정에서 일회용품은 언제나 다량 발생했고, 나는 잘 분리수거를 해 집 밖으로 깔끔하게 돌려줬다. 그 후 그 쓰레기들의 행방은 모른다. 일반쓰레기로 분리하지 않았으니 어딘가에서 재활용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여행이나 이사는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다. 설거지가 귀찮아서 집안에서조차 일회용컵을 사용했던 일상은 어떠한가.

주부9단 그녀는 달랐다. 재활용이 확정된 쓰레기도 다시 돌아봤다. 내가 버린 쓰레기 중에 쓸만한 것들이 있는지 샅샅이 훑는 것은 습관이었다. 아직 쓸만한 것들을 위선자가 잘 분리수거해 인연을 마무리지었다면 진짜 영웅은 그것을 심폐소생해 멀쩡히 다시 살려놓았다. 한번 마시고 버린 종이컵은 세척하고 다시 말려 잡동사니를 담아두었고, 이사하며 옷가지들을 담았던 비닐봉지와 박스들은 다시 본연의 역할로 돌아왔다. 그녀는 뭣하나 지구로 온전히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종이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언젠가 기념품으로 받았던 텀블러에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물맛이 더 좋아졌나. 잘 모르겠다. 짐가방을 싸며 일회용 위생백을 사용하지 않았다. 편리한 맛은 확실히 줄었다. 일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우리집 주부9단은 항상 번거로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지구를 살리는데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원하는 건 알뜰한 가정의 살림.

지구의 영웅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작은 집안의 살림도 알뜰하게 헤쳐나가지 못하는 어설픈 환경보호 이론가에게 지구를 살리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놀랍지만 그런 능력은 쇼파와 한몸이 된 평범한 주부9단이 가져갔다. 조금 불편하고, 번거롭다. 우리집 살림을 도맡고 있는 주부9단도 그러하고, 지금 이시간에도 일회용품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환경보호 실천가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회용 위생백을 살렸고, 종이컵을 살렸고, 집안살림을 살렸고, 지구를 살렸다. 역시 세상은 알은체하면 말만하는 사람보다 행동하는 사람들이 바꾼다.

그래서 어설픈 이론가는 실천을 겸비해보기로 했다. 우리집 주부9단에게 질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젠체하며 이론과 실천을 잔소리할 그 날을 위해 오늘도 텀블러를 가방 깊숙이 챙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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