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입선] 내가 옷을 버리고 얻은 것(한영민) 제 2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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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3-05-23본문
옷을 좋아했던 나는 습관적으로 의류 쇼핑 어플을 켰다. 거기에는 늘 내가 갖지 못한 옷들이 가득했다. 집에 청바지는 많지만 내 몸에 꼭 맞다고 생각하는 청바지가 없다. 블라우스도 많지만 나한테 어정쩡하게 커서 핏이 예쁘지 않다. 슬랙스가 가장 유용하던데 네이비 색이 없으니까 하나 살까. 집 앞 나갈 때나 여행 갈 때 입을 맨투맨이나 후드티도 몇 개 있어야 하는데. 티셔츠는 너무 파였거나 목이 너덜너덜해져서 손이 가질 않으니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아 참, 곧 여름인데 반바지랑 스커트가 별로 없다. 무엇보다, 지금 이 쇼핑몰에 뜨는 이 원피스, 너무 내 스타일이다. 이건 사야되는데. 우습게도 내가 쇼핑몰 어플을 켤 때마다 필요한 것이 늘어났고 한정된 예산 안에서 합리적으로 옷을 고르느라 두 눈에 불을 켜고 두시간, 세시간 쇼핑에 집중했다. 보고 있다보면 사야할 게 너무 많아서 골치를 썩다가 겨우 몇 개를 주문하고 잠에 들었다. 옷이 오면 정말 즐거웠지만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쇼핑 어플을 켰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인스타그램에서 ‘패션 산업이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는 문구를 보았다. 헉, 정말인가? 나름대로 지구 환경에 대한 약간의 부채감을 느끼고 있어 왕왕 카페 갈 때면 텀블러를 챙겨 가는 내게, 그것은 꽤 충격적인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옷들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니. 문득 옷을 살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에 의식적으로 쇼핑을 피했다. 하지만 그도 한두달 뿐, 계절이 변할 때면 자꾸 슬며시 옷을 사고 싶어졌다.
작년 가을 쯤, 친구가 시골에 한옥스테이를 할 기회가 있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시골에서 쉬면서 냇가에서도 놀고 책도 읽고 별 뜨는 것도 보자고. 재미있을 것 같아 바로 짐을 쌌다. 시골이니까 예쁜 옷은 필요 없었다. 나는 아끼는 옷은 거들떠보지 않고, 편한 옷, 지저분해져도 마음 상하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입은 후 추울 때 입을 보풀 핀 가디건 하나를 챙겨 집을 떠났다.
이틀 정도를 시골 마을 한 귀퉁이에서 보냈다. 그 곳에는 나와 친구 뿐만 아니라 그곳을 지키는 운영진들과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체험 활동도 하고 식사도 하고 모닥불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했다.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풀벌레 소리 속에서, 그들 중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옷이나 얼굴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인연을 축하하고 이 곳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살아오는 동안의 소소한 일화와 함께 먹는 음식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나는 후줄근한 티셔츠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주눅들거나 눈치 보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에는 친절과 배려가 들었고, 그 누구도 다른 이들의 생김새나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덩달아 겉모습에 대한 모든 의식에서 자유로워졌다. 둘째날 밤에는 친구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에 누워 별을 보았다. 캄캄한 밤에 별을 볼 때 친구와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가 고마웠고, 쏟아질 듯한 별 아래서 마음이 충만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온전한 ‘자유로움’이 주는 행복감을 그 두 밤 사이에 깨달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것, 내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엄격한 기준에서 자유롭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서 잠에 들기까지 내가 입은 옷과 내 얼굴이 어떤지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정말 큰 행복이었다.
한 번 크나큰 행복을 맛본 뒤 나는 옷 욕심이 줄었다. 옷에 관심이 없어져 안 입는 옷들을 친구에게 나눠주고 팔기도 했다. 내 옷장에는 옷이 줄었지만 내 삶은 더욱 풍성해졌다. 내 주변에는 옷에 관심이 많은 친구 외에도 스포츠, 자기의 일, 동물, 식물, 음악,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취미 생활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 늘었다. 내 관심 분야가 옷에서 다른 것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옷과 패션에 신경 쓰던 지난 날이 무색할만큼 나는 새 옷 없이도 행복하고, 이제는 환경 오염의 주범이 되는 패션 산업에 더 이상 일조하지 않는다. 나의 돈은 옷 대신 환경 단체나 친환경 제품, 제로웨이스트 제품을 쓰는 데 쓰인다. 내가 가치 있는 소비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 내가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기쁨,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대신 내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좋다. 이 지구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이 커다란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어 감사하다. 자연과도 어울려야 하고 사람과도 어울려야 하는 이 어려운 지구 생활, 지혜로운 답을 찾아나가는 내가 자랑스럽다. 이 좋은 지구에 누군가와 함께 있고, 겉치레 없이 맑게 기분 좋을 수 있다는 것, 편안하고 아늑하게 살아나가는 지금이 나는 예쁜 옷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