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입선] 불량이라는 주홍글씨 (김혜정) 제 2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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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3-05-23본문
예닐곱 평 되는 사무실에 앉아 내 주변을 플라스틱과 플라스틱 아닌 것으로 나누어본다. 컴퓨터, 냉온수기, 핸드폰 케이스, 구급상자, 볼펜껍데기, 출입문 보안카드는 플라스틱이고 책상, 옷장, 텀블러는 플라스틱이 아니다. 플라스틱 제품이 월등히 많다. 이 중에서 텀블러를 집어 든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장에서 생산했는데 불량 판정을 받은 제품이다.
나는 사출공장에 다닌다. 플라스틱 제품을 기계로 찍어내는 곳이다. 플라스틱은 나의 밥줄인데 세계는 지금 탈 플라스틱을 이야기 한다. 나는 생계를 위해서 플라스틱을 생산해야 되고 환경을 위해서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는 과연 내 일상에서 플라스틱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 몇 퍼센트나 될까? 세계인의 우려 담긴 목소리에 나는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내가 제출하는 답은 ‘함부로 버리지 않기’이다.
공장에서는 매일매일 버려지는 불량품이 어마어마하다. 가스, 미성형, 흑점, 스크래치 등등 불량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사용하기에 아무런 지장도 없는데 불량으로 선별되어 버려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티끌보다 작아 그 부분을 콕 집어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는 흑점불량이 그것이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원료로 어린이용 식판과 숟가락, 포크를 사출한 적이 있었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어른, 아이 모두 좋아했던 제품이었다. 식판 한 귀퉁이에 흑점 한두 개 있다는 이유와 숟가락에 약간의 수축이 생겼다는 이유로 품질검사에서 불량 판정을 받았다. 그 숫자가 대략 3~4백 개 정도 되었다. 돈의 액수보다 멀쩡한 제품인데 버려진다는 사실에 너무너무 속상했다. 그때 나와 동료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어린이집과 다문화 가정을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그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흔쾌히 식판세트를 받아갔다.
양주를 마실 때 얼음을 넣어 술을 시원하게 하는 아이스 박스는 흑점과 기포가 있다는 이유로 불량 판정을 받았다. 일부는 현장에서 볼펜, 풀, 니퍼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일부는 바닥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메리골드, 채송화 등을 심어 동료들과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조금 전 집어 든 텀블러에 물을 따라 마신다.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향 때문인지 마음이 한결 차분해 지는 것 같다. 이 컵은 목분으로 사출했다. 원료가 나무라서 온도가 낮으면 희끗해지고 온도가 너무 높으면 불에 탄 것처럼 연한 갈색의 얼룩이 생긴다. 당연히 상품 가치가 없는 불량품이다. 그러나 물이나 커피를 타서 마시기에 어떤 불편함도 없다.
우리 공장은 1인당 하루 평균 최소 5개의 종이컵을 사용한다. 열흘이면 1000개 정도의 종이컵이 한 번 사용 후 버려진다. 매일 종량제 봉투에 수북하게 버려지는 종이컵은 사실상 회사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이 골칫거리를 불량 텀블러가 한방에 해결해 주었다. 따지고 보면 효자 불량품인 셈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도 버리는 순간 쓰레기가 된다. 더구나 플라스틱은 썩지 않기에 세상을 돌고 돌아 내 밥상 위에 올라올 수도 있다. 반찬으로 먹었던 생선이 아주 작은 핸드폰 조각을 삼켰다면 내 목으로 넘어간 것은 생선일까 핸드폰일까? 상상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이다.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고 노래했다.
식판과 아이스 박스, 텀블러는 비록 불량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함부로 버려지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불리어졌고 불량이라는 주홍글씨가 지워졌다. 그리고 제 이름으로 생명을 다할 기회를 얻었다.
내일은 도마를 사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도마에게 새겨질 주홍글씨 따위는 없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