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입선]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김예슬) 제 2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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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3-05-23본문
무려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가위로 몸통을 잘라 손가락으로 구석구석 발라 쓴 비비크림이 동나는데 까지 말이다. 자연스러운 피부 노화의 과정을 받아들이고 싶었고 그래서 화장품도, 그 절차도 하나씩 줄여가는 와중이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툭, 휴지통에 버리면 그만일 빈 튜브였겠지만, 내겐 '드디어' 맞이한 순간이었다. 그래, 드디어 노메이크업으로 활보할 시간이 왔다.
하지만 그 후 며칠간, 민낯이 어색하단 핑계로 마스크를 썼다. 얼굴의 절반을 가렸음에도 칙칙한 내 눈두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목격했다. 백탁 현상이 있는 선크림을 발랐는데도 안색이 안 좋다는 누군가의 걱정 어린 소리도 들었다. 화룡점정,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나홀로 산행에서조차 기어코 천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자연스러운 지구인으로 살아보겠다더니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결국 나는 다시 새로운 화장품을 들이고야 말았다. 구구절절했던 과정과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너무 쉽게 번복됐다. 소재가 다양하고 복잡한 팩트 타입 대신 이번에도 튜브 형태를 골랐다는 것으로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애썼다며 죄책감을 반감시켰지만, 주변에도 당차게 선언한게 떠올라 머쓱해졌고 결국 화장품을 안 쓰겠단 각오와 과정, 결과까지 모두 혼자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이렇듯 욕심, 우려, 물건의 폐기를 없게 하려는 나만의 '제로' 웨이스트를 향한 여정에서 여전히 나는 좌충우돌한다. 소비가 미덕인 세상에서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언제라는 게 오기는 할까 의구심에 의지가 한풀 꺾이기도 하면서.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음 놓고 이것저것 사재끼던(!)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게 더 힘드니 할 수 있는 한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사고하려 고군분투할 수밖에.
지향점은 '제로' 웨이스트이며 현재는 덜 버리는 '레스' 웨이스트를 실천하고 있는 나.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살펴보기로 했다. 튜브 타입의 단품 화장품을 고집하는 것과 같은 소소한 것들처럼, 부담스럽지 않아 지속하는데 동기 부여가 되길 바라며.
가장 먼저 수선을 즐기게 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헤지다 못해 삭고 구멍 난 양말과 가방을 색색의 실로 기우고 더 사부작 댈 것들이 없는지 둘러보게 된 내가 말이다. 지루하다며 교과 '가정' 시간을 견뎠는데, 몇 만 원의 돈을 기꺼이 지불하고 바느질을 배우러 가기도, 영상을 찾아 보관 버튼을 누르기도 하는 나 말이다. 닳아버린 무언가를 내보이기 부끄러워했던 10, 20대를 지난 30대의 나는 이만큼 달라졌다. 제로 웨이스트의 마법이다.
"용기를 가져오면 일회용품 없이 음식을 담아 갈 수 있나요?" 묻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많은 인원을 초대해서 대접해야 했던 집들이 날엔 일회용 그릇 구매 대신, 가까운 시댁에서 접시와 수저세트를 빌려왔다. 선물할 꽃 다발을 날짜 지난 신문지에 포장하고, 깨진 화분과 접시를 옻으로 수리해 다시 쓰며, 천 마스크를 매일 밤 손 빨래하고, 세탁기 돌리는 횟수는 줄이려 노력한다.
약간의 뻔뻔함, 일말의 여유, 그보단 많은 세심함이 한데 어우러져 나의 매일은 조금씩 덜 버리는 생활로 나아간다. 공존을 위한 거창하지 않는 노하우들이 켜켜이 쌓여서, 끝내는 애쓰지 않아도 쓰레기통이 필요치 않은 진짜 '제로'웨이스트에 도달하고 싶다. 이런 생활이 더 익숙해지고, 농익은 뻔뻔함과 굳은 심지가 함께하는 어느 날엔, 민낯의 얼굴로 천 가방을 메고 슬렁슬렁 산책하는 게 일상인 내가 되어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좌충우돌, 고군분투하는 모든 순간의 나를 기꺼워할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