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화장실 청소와 EM (황혜림) > 지구생활수기공모(당선작)

사이트 내 전체검색

뒤로가기 지구생활수기공모(당선작)

제3회 [입선] 화장실 청소와 EM (황혜림) 제3회 수상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4-05-21

본문

오늘도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세제를 바닥에 들이부으며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인공적인 오렌지 향에 코가 얼얼해졌다. 이번에 새로 산 세제인데, 향이 좀 세네, 라는 생각을 하다 문득 내가 청소했던 화장실들이 머릿속을스쳐 지나갔다. 7평짜리 자취방 화장실, 기숙사 화장실, 중학교 여교사 화장실… 요즘도 학생들이 교사 화장실 청소를 하고 그러나, 라는 생각을 하다 잠시 추억에 젖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여교사 화장실 청소 당번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를 마치면 매일 여교사 화장실 청소를 했다. 하루는 청소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나를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돌아보니 기술 선생님이었다.


“화장실 청소할 때, 이거 한 번 써볼래?”


선생님께서는 다짜고짜 오줌 같은 액체가 담긴 분무기를 내밀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들어보니 친환경 미생물 세정액이라고 했다.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인데, 세정력이 괜찮은지 이번 기회에 시험해보고 싶다고하셨다. 나는 바로 분무기를받아 들고내일부터사용해 보겠다고했다. 미생물이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설레기까지 했다.


 다음 날부터 바로 미생물 분무기를 사용해서 화장실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세정액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오묘한 냄새가 났다. 쌀을 술에 넣고 오래 두면 이런 냄새가 날까? 확실히 전에 쓰던 세제보다 불쾌한 냄새였다. 나는 선생님의 지령대로 세정액을 뿌리고 때를 불린 후, 닦아내면서 물때와 얼룩이 잘 벗겨지는지 관찰했다. 미생물들이 열심히 때를 닦고 있을 거라고 상상해서일까, 왠지 세제보다 훨씬 청소가 잘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소를 끝내고 나면 항상 선생님께서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선생님은 기대에 잔뜩 찬 표정으로 때는 잘 벗겨졌는지, 냄새는 어떤지, 세제보다 나은지 꼬치꼬치 캐물으셨다. 왠지 청소가 더 잘 되는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눈에 띄게 좋아하셨다. 그런 선생님을 보며 뿌듯했다. 손에 쥔 미생물 분무기가 왠지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한 선생님께서 청소하던 나를 붙잡고는 얼마 전부터 화장실에서술 냄새가 진동한다며, 그 분무기 좀 갖다 버릴 수 없냐고, 대체 누가 그런 걸 시킨 거냐고 물으신 것이다. 내가 기술 선생님께서 직접 만드신 액체라고 말씀드리자, 선생님은 “또 그 분이니” 하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셨다.


 사실 기술 선생님은 교내에서 괴짜로 악명높은 분이셨다. 선생님은 자타공인 ‘맹꽁이 덕후’로 흙이 잔뜩 묻은 벌레와 동물들을 자식 쓰다듬듯이 만지며사랑스러워하셨고, 그래서인지 항상 옷에서이상한냄새가 났다. 언제 한 번은 학교 정원에서 도망친 토끼를 찾아야 한다며, 수업 도중 교실 문을 벌컥 열고 환경부 동아리 아이들을 소집해 가는 바람에 담임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이 이제는 여교사 화장실까지 침범해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액체를 뿌려대니, 여선생님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괴짜’답게 선생님께서는 전혀 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번에는 냄새가 조금 덜 나게 만들어보았다며 새로운분무기 통을쥐여 주셨다. 여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청소를 하는 일은 쉽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자부심과 의무감이 솟아오르는 일이기도 했다. 영웅은 언제나 미움받는 법이 아닌가. 그런 선생님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나도 미생물 액체를 만들어보겠다고 주방을 헤집어 놨다가 엄마에게 된통 혼이 난 적도 있었다.


 화장실에 잔뜩 뿌려 둔 세제의 오렌지 향기를 맡으며, 그때 그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왠지 불결해 보이는 외양에, 이상한 냄새가 나 다들 반기지 않지만 자기 자리에서 누구보다 더 맑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미생물 같았던 분. 오렌지 향이 나는 2천원짜리 세제처럼 손쉽고 해로운 것들보다, 다들 반기지 않는 한 통의 분무기처럼 어렵고 무해한 것들을 향해 팔을 뻗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분. 어쩌면 나는 그분에게 깨끗한 세상을 빚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을 뒤져 그때의 그 미생물 분무기가EM 발효액이었다는사실을 알아냈다.EM 원액과쌀뜨물, 설탕, 소금을 적절하게 조합해서 일주일이나 발효시켜야 하는, 생각보다 귀찮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한 통의 분무기에 차올랐던 자부심과 나의 미생물 영웅을 떠올리며, 오늘부터는 나도 어렵고 무해한 것들을 향해 손을 뻗어보기로 한다.


 이제는 엄마에게 혼날 나이를 훌쩍 넘어선 나는, 열다섯 그때처럼 주방으로 향했다.

BASIL@2019 Willden Corp. All Rights Reserved.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