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입선] 신호탄 (최보현) 제3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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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4-05-21본문
나에게는 특별한 친구가 한 명 있다. 눈동자는 하늘처럼 맑은 푸른색이고 단발머리는 밝은 갈빛을 띠고 있다. 구별하기 쉬운 외형을 가진 나의 친구는 야쿠티아에서 왔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나의 친구가 처음 전학을 왔을 때, 반 아이들은 들릴 듯 말 듯 소곤대며 저마다 추측했다. 친구의 예상 국적이 열 다섯 개를 넘어갈 때 쯤, 드디어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그리고 친구의 진짜 국적을 듣고 나선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야쿠티아.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 듣는 나라라는 반응이었지만 지질학에 관심이 많던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려 전체 국도의 40%가 북극권에 속해있는 야쿠티아의 땅은 365일 내내 꽁꽁 얼어붙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북반구에서 가장 한랭한 곳으로 손꼽히는 곳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나는 친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매일 아침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물론이고 종종 간식거리를 사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에도 눈에 띄는 관계의 발전은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닝 포인트가 생겼다.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에 한 지구 사랑 수업이 그것이었다.
학교에 방문하신 강사 선생님은 6도의 악몽에 대해 수업하셨다. 지구의 온도가 1도씩 오를 때마다 벌어지는 일에 대해 배웠는데, 그 내용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1도가 올랐을 때는 폭우나 산불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한다고 했고, 2도가 올랐을 때는 식량난이 시작된다고 했다. 재앙은 차근차근 심화된다. 3도가 넘어가면 지구 생명체의 37%가 사라지고 4도가 넘어가면 해수면이 7미터를 넘게 상승한다. 그리고 마침내 6도가 넘게 올랐을 때, 인류는 멸종하게 되는 것이다. 강사 선생님이 틀어두신 시청각 자료가 깜깜하게 암전되고 얼마 후에 친구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업 종이 치고 나서도 한 동안은 집중이 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원래 야쿠티아는 토양 온도가 0도 이하로 유지되는 곳이라고 한다. 이를 영구동토층이라고 부르는데, 내가 알던 것과 달리 영구동토층은 일 년 내내 얼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철엔 온도가 올라가서 얼음이 녹고 습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지나가면 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얼어붙어야 하는데, 요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여름이 아니어도 땅이 녹고, 겨울이 찾아와도 다시 얼지 않는단다.
그리고 이런 기현상의 원인은 지구 온난화 때문이었다. 지구 온난화라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에 지구 온난화가 해빙 현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접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북극의 얼음에만 국한되는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밟고 서는 땅이 열기에 못 이겨 녹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보금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북극곰의 생명만을 위협하는 줄 알았던 지구 온난화는 사실 인류의 살 곳도 위협하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끝났는데도 나와 친구의 대화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야쿠티아에 여름에는 생물들이 크게 번성한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나면 생물들은 죽게 되고, 그 사체들은 그대로 빙결된다. 낮은 온도에 의해 분해되지 않고 동토층 밑에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야쿠티아에서는 수십만년간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야쿠티아의 땅 밑에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사체들이 있고, 이는 곧 유기탄소를 뜻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력한 온실효과를 가진 메탄과 이산화탄소가 많다. 그런데 동토층이 녹아버리게 되면 이것들이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온실가스가 더 생기는 것 아니냐는 나의 말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이 녹아서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큰 줄 알아? 잠을 설친 적도 많아. 사냥할 때 들리는 총성인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총성하고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발 밑의 땅이 녹고 무너지는 것이 죽음하고 다를 것이 있나. 나는 물끄러미 친구와 나의 손을 내려다 봤다. 어쩌면 우리의 손은 지구를 겨눈 총의 방아쇠에 닿아있는 것은 아닐까.
6도의 악몽을 수업하신 강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방법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서는 플로깅이 있었다. 플로깅이란 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환경 보호 운동이다. 어디가 됐든 달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하셨다. 학교에 오는 길에 있는 공원이 떠올랐다. 십 분만 걸어가도 지구를 지킬 수 있는 곳이 있었다니. 나는 친구에게 플로깅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생소한 말에 고개를 기울이는 것도 잠시 나의 설명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로 약속한 플로깅을 위해, 친구와 나는 쓰레기를 주워 담을 에코백을 한 개씩 가져오기로 약속했다.
순간이 모이면 그게 오늘이 되고 오늘들이 모여 내일을 만드는 것 아니던가. 그러므로 오늘을 바꾸는 건 내일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바꾸어낸 하루가 모여 미래라는 집합체가 되는 거다. 고로 미래는 고정 돼 있지 않은 것이다. 지구를 지키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당기기 직전의 상태에 있지만 아직 총알이 발사되진 않았다. 나는 굳세게 주먹을 쥐어냈다. 앞으로 우리가 들어야 할 총성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지구를 위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당찬 신호탄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