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선] 조금 귀찮아도 괜찮아 (정지은) > 지구생활수기공모(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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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입선] 조금 귀찮아도 괜찮아 (정지은) 제3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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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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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태어나던 해는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 찾아온 해였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가까워진 건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뜨겁던 그 여름, 집에서 누워만 지내는 갓난아기의 얼굴에도 빨갛게 태열이 올라왔다.


24시간 에어컨을 돌렸다. 바깥을 내다보면 모든 집의 베란다에서 실외기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더위에 실외기들이 뿜어내는 열기까지 더해지는 걸 보며 숨이 막혔다. 그 해의 폭염은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탓이라고 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북극곰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에어컨을 끄지 못했다. 북극곰이 죽는 것보다 내 딸의 얼굴에 올라오는 태열이 더 무서웠다. 


그즈음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새 한 마리가 죽어 없어진 자리에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새는 죽은 지 오래되어 깃털 몇 개와 뼛조각만 남아있는데 새의 배가 있었던 자리에는 병뚜껑을 비롯한 온갖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너무나도 온전히 남아있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배를 가득 채워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영양실조로 죽었을 거라고 했다. 그 새의 무리들이 자주 오가는 태평양 한가운데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섬이 있다고 했다. 덜컥 겁이 났다. 대체 지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24시간 에어컨을 돌리고, 물티슈를 물 쓰듯 쓰면서도 지구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딸이 살아가야 할 앞날이 걱정됐다. 북극곰을 비롯한 온갖 동물들이 사라진 지구에서, 플라스틱 쓰레기와 인간만 남아 외로이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뭐라도 하고 싶어서 일단 에어컨 쓰는 시간을 줄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또 다른 일을 찾아보는데 현실의 벽이 높았다. 천기저귀를 쓰자니 그걸 빠느라 손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고, 물티슈 대신 손걸레를 쓰려니 걸레를 빠는 데 드는 물과 노력이 더 큰 게 아닌가 하는 핑계가 떠올랐다. 배달음식에서 쏟아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지만 삼시세끼를 집밥으로 해결하자니 지구를 살리려다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았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온갖 핑계를 찾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먹는 야쿠르트 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플라스틱 분리수거함에 버렸었는데 야쿠르트 용기에는 얇은 포장비닐이 씌워져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닐을 벗길 수 있도록 절취선도 만들어져 있는데 그걸 모르고 그냥 버렸다. 비닐도 뜯지 않은 채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버렸던 야쿠르트 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태평양을 떠도는 플라스틱 쓰레기섬에 내가 버린 야쿠르트 병이 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플라스틱 용기에 붙어있는 비닐과 스티커를 집착적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쓰레기의 비닐과 씨름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냥 버리는데 너 혼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고도 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남편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비닐을 벗기기도 했고, 비닐이 잘 안 벗겨져 낑낑대는 모습을 보면 쓱 다가와서 대신 뜯어주기도 했다. 이제 우리 집에서 비닐 옷을 입은 채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없다. 


요즘은 플라스틱 용기에 든 물건 자체를 덜 쓰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세상에 플라스틱에 담긴 물건들이 어찌나 많은지 플라스틱을 안 쓰려면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할 지경이다. 천천히 하나씩 도전하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일회용 컵으로 음료 마시지 않기에 도전 중인데 쉽지가 않다. 특히 요즘처럼 따뜻한 날에는 아이스커피 하나 들고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내가 시원하게 홀짝이는 커피 저 너머에 코에 플라스틱 빨대를 꽂은 채 죽어가는 거북이가 있다는 걸 생각하며 집에서 시원한 음료를 챙겨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딸이 여전히 살아가야 할 50년 후쯤에도 지구에 거북이와 북극곰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귀찮고. 불편하고, 어색한 일들을 하는 순간들이 모여 그들이 사라지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야쿠르트 비닐을 뜯고, 음료를 미리 챙겨나가는 일 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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