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입선] 비닐봉지 한 장 (이은경) 제3회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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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4-05-22본문
“아뇨. 아뇨. 그냥 주세요. 장바구니 가져왔어요.”
결제할 카드를 내밀면서 동시에 내 눈은 비닐 뭉치를 뜯으려고 손을 뻗는 점원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손사래를 흔들며 외친다. “장바구니 가져왔어요!”라고..
비닐봉지를 쓰기 싫어서 차 안이나 가방 안이든 여러 개의 장바구니를 넣고 다닌다. 마트에서 장을 보든, 음식 포장하러 갈 때나 쇼핑하러 나갈 때 뿐 아니라 계획에 없던 일정에도 장바구니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정육이나 생물을 사러 갈 때는 택배배송 때 받아 냉동고에 얼려 둔 아이스 팩을 플라스틱 통에 넣어 가져간다. 자주 가는 마트에서는 이런 나를 기억해서 먼저 플라스틱 통을 달라고 하기도 한다. 장바구니를 안 가져오면 집에 가서 장바구니를 가져오든, 장보기를 미룰 정도로 나는 비닐봉지에 유난스럽다. 닐을 안 쓸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장바구니만은 내가 유일하게 지구환경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랄까.
그런데... 나의 이 비닐봉지 집착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생각해보니 우연히 보게 된 사진이 시초였던 것 같다. 해파리인 줄 알고 비닐봉지를 삼킨 거북이의 사진이었다. 긴 비닐봉지가 거북의 기도를 막아 고통 받던 모습이 큰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라는 말처럼 아무 의식 없이 쓰고 내버린 비닐봉지가 돌고 돌아 바다에 사는 거북이의 일상을 파괴하는 데 나도 모르게 거들고 있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이라곤 비닐봉지 덜 쓰고 장바구니 쓰기였다.
엄마의 호들갑에 무심해하던 아이들도 이젠 편의점 간다며 나서는 현관문에서 “엄마, 장바구니!” 라면서 삐죽 고사리 손을 내민다.
비닐봉지에 대한 나의 집착은 이제 범위를 넓혀 플라스틱, 음식쓰레기, 동물복지 등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제품을 살 때는 뒷면 라벨에 분리 배출 용기가 어떤 건지 확인하고 구매한다. 기사를 볼 때도 환경 관련 기사에 눈길이 더 가게 되는데 최근에 아동, 청소년 16명이 주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기후소송에서 주가 헌법상 권리를 침해했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기사를 흥미롭게 봤다. 우리나라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어디까지 갔을까. 작년에 정부가 일회용 종이컵과 플라스틱 빨대 사용 규제 조처를 철회하고 계도기간을 무기한 연장한다는 결정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탈 원전이 맞는지, 원전이 친환경이 맞는지 냉철한 논의보다 정치적 이념으로 갈라져 화두조차 올리지 못하는 현실이 참담하다.
푸르고 싱그러운 4월의 봄 날씨가 숨이 턱턱 막히는 한 여름 더위로 바뀐 요즘은 계절도 날씨도 가늠하기 어렵다. 문득 나의 비닐 집착이 부질없어 보인다. 나 혼자 비닐봉지 몇 장 덜 쓴다고 거대한 지구환경이 달라질까. 비닐봉지에 대한 집착이 시들해질 무렵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내 부모님은 바쁜 일상에도 선거날이면 출근 전 새벽이든. 서둘러 퇴근하고 오시든 꼭. 반드시. 투표를 하셨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부모님의 투표 참여의식은 사뭇 진지하고 엄숙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 행여 투표를 안 할까봐 투표장으로 밀어 넣어야 안심하셨다. 자녀들이 각각 출가나 독립한 뒤에도 전화로 투표했는지 확인하셨다. 국민이면 응당 해야 하는 거라며 잔소리를 한 가득 들려주면서. 부모님의 영향인지 마흔 중반을 넘어선 나는 매번 꼭. 반드시. 투표를 한다. 총선 전에 지인들과 이런저런 사담을 하다가 자연스레 화두가 총선으로 흘렀다. 내가 투표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내가 안 해도 뽑힐 사람은 다 뽑혀,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선거냐, 등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지인들이 있었다. 하긴 내 표 한 장에 선거결과가 바뀌겠어, 싶다가 비닐봉지가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착시감이 든다. 비닐봉지 한 장, 투표 한 장이 세상을 바꾸지 않겠지.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다. 비닐봉지 한 장을 안 쓸려고 유난 떠는 사람, 좀 더 나은 사육환경에서 길러진 계란을 사려고 일련번호를 확인하는 사람, 뷔페에서 음식을 안 남기려고 덜 담아오는 사람, 나에게 주어진 투표를 꼭. 반드시.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거대한 물결처럼 휩쓸려 가는 다수의 생각들과 생활습관을 거슬러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고 미련스레 보인다. 내가 먼저 미비한 발자국을 낼 때 내 가족들이, 내 이웃들과 동참하다 보면 언젠가 길이 나 있지 않을까 하는 위안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