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장려상] 보리차 요정의 식수 과도기 썰(한세희) 제 2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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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리차 요정이다. 마실 물이 떨어지면 알아서 잘 리필하여 센스있게 냉장고에 채워 넣는 요정. 정확히는 보리차 끓이는 요정이 되겠다. 마실 물을 만드는 작업은 일종의 숙명과도 같다. 싫으나 좋으나 해야 하는 일. 자고로 사람이 먹는 물은 팔팔 끓여야 안전하다는 내 어머니의 강력한 믿음과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정직한 수돗물이 만나서 탄생한 시스템이랄까. 거기에 정수기 없음도 한몫 한다.
여기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생산하기 귀찮을 뿐. 보리차가 식수가 된 것은 나름 건강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카페인이 없어서 마셨을 때 그대로 수분 섭취가 된다고. 처음엔 티백으로 우려냈는데 맛이 텁텁해서 중간에 통알곡 보리로 갈아탔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보리알을 넣고 끓인 물은 확실히 다르다. 몇 배로 더 구수하고 청량하다. 둘의 차이를 이제 구분할 줄 안다.
요정은 과거 시절 자취를 했었다. 자취할 때 필수품은 뭐니뭐니 해도 사 먹는 생수 아니겠는가. 코스트코에서 파는 커클랜드 2L×6개짜리 생수를 층층이 쌓아 놓고 마셨다. 손을 뻗어 냉장고를 열면 맑고 시원한 물을 언제든지 마실 수 있었다. 물론 그 덕에 생수병도 쉽게 나왔지만. 처리하는 기술도 같이 늘었다. 라벨띠지를 떼어 내고 뚜껑을 열어 발로 “푸슉”. 10초면 된다. 내가 또 한때 생수병 좀 밟아 봤다. 푸슉푸슉.
5년 간의 기술을 청산하고 본가로 내려왔다. 그런데 와....내가 잊고 있었다. 우리집은 생수를 절대 사 먹지 않는 집이라는 걸. 뭐 어쩌겠냐며 아쉬운 사람이 장단 맞춰야지 이렇게 적응해 보려 했으나 나는 곧 생수 금단(?) 현상으로 온몸이 근질거렸다. 우선 착각 때문에 힘들었다. 냉장고를 열면 언제나 차가운 생수가 대기 중일 거란 착각. 초반에 냉장고 문을 열고서 얼마나 자주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 다음은 수동 작업의 번거로움. 마실 물이 동나기 무섭게 또 끓여 놓아야 하는 정성은 필수다. 아니 의무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자, 빠릿빠릿 움직여야 할 테니! 자칫 게을렀다간 한여름에 따끈한 물로 속을 지질 수가 있다. 푹푹 찌는 계절에 그건 고문이다. 부엌은 온통 열기로 삐질삐질. 냄비도 딱하고 나도 딱하다. 그렇지만 마실 물로 이열치열 하기 싫어서 요정은 파업할 수도 없다.
(귀찮아서) 불편한 시기를 지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무덤덤해진다. 여기에서 무덤덤은 나쁜 뜻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백번 맞다. 툴툴거리며 하던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물이 펄펄 끓는 냄비 뚜껑을 열고 수돗물 특유의 약 냄새를 싹 날려 준 다음 불을 줄이고 통알곡 보리 한줌을 가득 집어넣었다. 적당한 시간을 들여 구수함을 추출해 내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겠다. 싱거워도 별로고 진해도 별로니까. 뜨거운 물에서 한 김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용 물병에 리필해 준다. 그러고 나서 요정은 셔터를 내린다.
여전히 계속 뭐가 없다. 정수기도 없고 생수를 사러 마트나 편의점에 가는 일도 거의 없다. 떼어 낼 라벨띠지도 없고 납작하게 발로 밟아 낼 생수병도 없다. 확실하게 있는 것은 열일하는 냄비, 밀폐 용기에 담긴 보리알 그리고 물 끓이는 나 자신이다. 어딘가 휑한 것 같지만 뭐 괜찮다. 그런대로 충분하다.
올해 벚꽃은 좀 일찍 핀 감이 있다. 거기에 맞춰서 여름도 빨리 올 거다. 맨날 올여름이 가장 더울 거라고 엄포를 놓는데 과연. 이번 더위가 얼마나 기승을 부릴지 살짝 겁난다. 찌는 날 불 위에서 춤추는 보리알이라니. 아는 그림에 헛웃음이 나오려다 그것만큼 심신 안정에 또 좋은 게 없잖아? 하고 긍정회로를 돌리는 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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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den님의 댓글
Willden / 작성일수상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