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입선] 감식초 같은 인생 (문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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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감식초를 담가 먹었다. 감이 풍부한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된 덕분이다. 그렇다고 시골에 내려온 첫해부터 식초를 담근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감이 쏟아지면서 너무 많은 감을 어찌할 수 없자 식초를 만들기 시작한 거였다.
“집에 감 있어?”
이 동네엔 감이 흔해서 선물로 감을 주려면 물어보고 줘야 한다. 집에 감 있는지. 그러면 십중팔구까진 아니어도 열에 예닐곱은 “응, 감 많아.” 한다. “없어, 감 줘 봐.” 하면 그제야 기쁘게 줄 수 있다. 감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집에도 감이 많이 들어온다. 내 둘레 사는 이웃들이 “집에 감 있어?” 하고 물어보면서 선물로 넉넉히 준 덕분이다. 두어 해 전부터는 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내가 나눠 주는 사람이 됐다. 같이 사는 옆지기가 감 따는 철에 일손을 보태러 나갔다가 받아 오는 못난이 감들이 많아진 덕이다.
그렇게 감이 많이 들어오는 철엔 빨리빨리 먹어야 한다. 아침에 하나, 점심에 하나, 저녁에 하나. 온 식구가 한동안 감 축제다. 우리 집엔 저온저장고가 따로 없어서 가장 서늘한 베란다에 감을 놔두어도 어느새 익어 버린 감은 물러 터지기 일쑤다. 그러면 어느 틈엔가 피어난 곰팡이와 어느 틈엔가 세를 든 초파리 그리고 또 어느 틈엔가 만들어진 식초 물로 베란다는 엉망이 된다.
“으악! 감 좀 그만 받아 와!”
감이 넘치면 옆지기한테 잔소리를 퍼붓는다. 옆지기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다음 날이면 또 두 손에 못난이 감들을 가득 들고 온다. 욕심은 쓰레기를 만든다. 공짜라면 일단 다 챙기고 보는 마음을 버리는 것도 지구를 위한 일이다. “괜찮습니다, 집에 넉넉히 있어요.” 말하면 좋을 텐데.
이 많은 감이 다 음식물쓰레기가 된다고 생각하면, 감을 날마다 들고 오는 저 아저씨의 멱살을 쥐고 싶어진다. 그냥 감밭에 두면 좋은 퇴비가 될 애들을 기어이 집으로 끌고 들어왔으니 말이다. 힘닿는 대로 밭에 나가 퇴비 무더기에 놓고 와야 한다.
시골에 내려온 뒤로는 소금기가 없는 음식물쓰레기들을 늘 밭에 모셔 놨다. 도시에서 살 땐 음식물쓰레기가 정말 그저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는데. 농약과 제초제 없이 밭을 만들다 보면 좋은 흙이 정말 귀하다. 채소를 손질하고 나오는 여러 자투리와 껍질들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다 밭으로 돌려주는 까닭이다. 모두 아주 좋은 퇴비가 되니까. 밭 흙을 기름지게 해 주는,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보물이다.
내가 밭에 모셔가는 애들은 음식물쓰레기뿐만이 아니다. 바로, 오줌! 오줌을 따로 받아서 밭에 가져다주면 이 또한 귀한 거름이 된다. 오줌을 통에 모아 잘 묵힌 뒤 시간이 흘러 흘러 발효되면 흙에 뿌릴 수 있게 된다. 내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농사짓는 미생물들 덕분이다. 음식물도, 똥도, 오줌도 모두 미생물 덕분에 잘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오줌과 똥은 인간이 만든 것들 가운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창조물이 아닌가!
오줌 퇴비를 만드는 일은 아파트에 살아도 할 수 있다. 변기에 앉아 작은 통을 대고 오줌을 따로 받은 뒤 큰 통에 모아 뚜껑을 꽉 닫아 두면 냄새 걱정 없이 오줌을 모아 밭으로 낼 수 있다. 다만 똥은 좀 더 힘들다. 똥과 오줌이 섞이면 고약한 냄새가 나므로 똥과 오줌은 꼭 따로 모아야 하는데, 오줌은 오줌통에 오줌만 모아 두면 되지만 똥은 왕겨나 짚 같은 것들을 켜켜이 같이 놔야 냄새 걱정 없이 모을 수 있기에 아파트에서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으로 나도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뒤로는 똥 모으기를 거의 포기했다.
아무튼, 다 먹지 못한 채 상한 감들은 밭으로 모셔다 놔야 내 맘이 편하다. 그런데 이사 온 뒤로 집에서 밭까지 30분은 걸어야 해서, 내 체력으로는 날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썩은 감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는 날이 늘었다. 감이 아까웠다.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던데… 생각하면 더 맘이 불편했다. 그렇게 감을 버리지 않고 오래 보관할 방법이 뭘까 찾다가, 마침내 감식초를 담그기 시작한 거다.
감식초 역시 미생물들 덕에 만들어진다. 내가 할 일은 잘 익은 감을 잘 씻은 뒤 깨끗한 유리통에 꾹꾹 눌러 감물에 잠기도록 넣고 바람이 통하는 면 수건으로 유리통 입구를 잘 막아 두는 게 다다. 나머지는 이제 미생물 님의 몫이다. 아름다운 주홍빛 사이로 뽕뽕 올라오는 발효 거품 방울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맘이 편해진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한참 그 모습을 보고 있게 된다.
예쁘게 익어 가는 감식초를 보면서 ‘나도 잘 발효되고 싶다.’ ‘나도 잘 썩어서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좋은 흙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해 본다. 감식초처럼 시큰하게 잘 익어 가고 싶다고, 자연스럽게 살다가 예쁘게 물들고 조용히 자연으로 가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런 삶이 지구에도 이롭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올해도 맛난 감식초를 먹을 수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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