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장려] 메마른 밭에서 자란 마음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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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교정 한쪽 구석에 황폐한 밭이 하나 있었다. 땅은 갈라져 있었고, 잡초만 우거져 있어 누가 봐도 방치된 지 오래된 땅이었다. 나는 그 밭을 그냥 ‘쓸모없는 공간’이라 생각하며 지나쳤다. 그 땅이 내 일상을 바꾸고, 먹거리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게 될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어느 날, 복도 게시판에 붙은 작은 안내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4-H 동아리 신입 회원 모집’이라는 제목 아래 “지속 가능한 친환경 밭을 직접 가꾸어 보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방치된 그 밭을 동아리 활동을 통해 다시 살려보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순간 그 밭이 떠올랐다. ‘저런 땅이 정말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막연한 궁금증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원서를 냈다.
며칠 후, 동아리 첫 모임 날. 우리는 선생님의 안내로 문제의 밭 앞에 섰다. 예상대로 상태는 심각했다. 흙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잡초는 발목까지 자라나 있었다. 땅을 일구기 위해 삽을 들었지만 삽날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다. 이 땅에서 무언가를 키운다는 건, 마치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담당 선생님은 천천히,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땅도 쉬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손을 대면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그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우리가 밭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시작점이 되었다.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밭의 구조를 바꾸고, 퇴비를 섞고, 작물이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하나하나 갖춰나갔다. 처음 며칠은 진척이 느려서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흙이 부드러워지고, 뿌리내릴 수 있는 촉촉한 흙의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씨앗을 심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상추, 겨자, 고추, 오이, 옥수수, 가지 등 다양한 작물의 씨앗을 조심스레 흙 속에 심었다. 작고 여린 생명이 흙 속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매일같이 물을 주고, 온도를 체크하고, 잡초를 제거했다. 누군가는 “그게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일이냐”고 물었지만, 점점 자라는 식물을 보면서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상추는 생각보다 빠르게 자랐다. 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초록 잎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뭔가를 키운다는 게 단지 ‘수확’ 이상의 의미라는 걸 배웠다. 유기농법으로 길러지는 작물은 인내와 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가르쳐 주었다. 비료나 농약 없이, 자연 그대로의 방식으로 기른 채소는 그 자체로 시간이 만든 기적 같았다.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밭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메마른 흙이었던 땅은 싱그러운 초록으로 가득했고, 어깨를 나란히 한 작물들이 서로를 북돋듯 서 있었다. 수확한 채소는 마트에서 사온 것보다 훨씬 생생했고, 향도 강했다. 우리는 수확한 채소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으로 나눠 먹었다.
그때 먹은 샌드위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음식이었다. 손으로 길러낸 채소로 만든, 자연 그대로의 맛. 그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넘어, 생명과 자연의 고마움을 음미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마트에 가더라도 포장지에 적힌 ‘유기농’이라는 글씨가 어떤 의미인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자연이 주는 것, 그리고 그 자연을 해치지 않고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몸으로 배운 것이다. 친환경 농법은 단지 채소를 건강하게 길러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엔 그저 쓸모없어 보이던 밭. 하지만 돌이켜보면, 버려진 땅은 나 자신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 관심을 주고, 손길을 더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믿는 마음이 모여, 땅도 사람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자주 흙을 만지게 되었다. 혼자서도 작게나마 텃밭을 만들고, 쌀뜨물로 만든 친환경 비료를 써보기도 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내가 먹는 것부터 시작해 내가 사는 방식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먹거리’는 결국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거울 같다. 유기농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무농약이나 친환경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질문 같기도 하다.
내가 돌본 작은 밭, 그리고 그 밭에서 나온 건강한 채소들은 내게 분명히 말했다.
“좋은 먹거리는 좋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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