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대상] 냉장고 안에서 발견한 지구의 조각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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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냉장고는 마치 작은 시간여행기 같았다. 유통기한이 3년 전인 고추장이 무심히 자리 잡고 있었고, 파슬리 한 줌은 잎인지 종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가끔 냉동실을 열면, 싸늘한 만두 봉지가 발등을 내리쳤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음식들은 어느 순간부터 '먹으려는 음식'이 아니라 '있어서 죄책감 드는 음식'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SNS에서 우연히 '냉장고 비우기 챌린지'라는 글귀를 봤다. 나도 모르게 '우리도 해보면 어떨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가족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고, 아빠는 "그게 되겠냐"며 시큰둥했지만, 엄마는 "돈 아끼고 좋네!" 하며 호응했다. 동생은 "냉동실 치우면 게임팩 사줄거야?"라는 의외의 거래를 시도했다. 결국 '1등은 설거지 면제권'이라는 유혹에 모두 참여를 결심했다.
첫날 냉장고 문을 열자, 우리는 무언의 침묵에 빠졌다. 익명을 요구하는 반찬통들이 조용히 존재를 주장했고, 굳은 떡은 단단한 신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요구르트는 유통기한을 1년 넘겨 숙성의 길로 접어들었고, 엄마는 각종 유행하던 다이어트 간식들을 보고 “이걸 왜 샀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정리 후 냉장고에는 정체불명의 재료들이 남았다. 반 쪽 남은 가지, 누군가가 한입 먹고 덮어둔 치즈, 냉동실 안 깊숙이 잠들어 있던 옥수수 몇 알.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는 감자. 음식 같지 않은 음식들을 보며 가족 회의가 열렸다. “이걸로 뭐 해 먹을 수 있을까?”라는 막막한 질문이 뜻밖에 즐거운 고민거리가 되었다.
엄마는 남은 나물과 밥을 섞어 '비빔밥 오마카세'를 선보였고, 아빠는 고추장과 통조림을 과감히 혼합해 '아빠식 퓨전찌개'를 탄생시켰다. 동생은 남은 빵과 과일을 믹서기에 넣고 “디톡스야!”라며 잔을 건넸다. 맛은 다소 실험적이었지만, 식탁은 웃음으로 채워졌다.
며칠이 지나자 음식물 쓰레기 양이 확 줄었다. 냉장고는 여백이 생겼고, 식탁 앞 대화는 길어졌다. 우리는 음식을 소비하는 일이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이고, 태도였다.
하루는 동생이 말없이 떡국떡을 꺼내 구워 주었다. “이게 뭐야?”라고 묻자, 동생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음... 덜 버리는 형제애?” 그 순간 웃음이 터졌고, 나는 알았다. 냉장고를 비운다는 건 단순한 정리를 넘어, 버려지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냉장고 비우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우리 가족을 조금 다르게 만들었다. 장을 덜 보게 되었고, 남은 음식은 '애물단지'가 아닌 '가능성의 재료'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지금도 냉장고 문을 열면 느낀다. 식재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적당히 비워진 공간과 그 속에 남은 나의 습관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음식이 아니라 우리가 지키고 싶은 지구의 조각들이 조용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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