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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생활수기공모(당선작)

제1회 [우수] 표준의 이동 (차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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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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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사람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선조들의 속담은 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때문에 환경의식이 투철하진 않더라도 페트병의 라벨을 벗겨야 실제 분리수거가 가능하다는 기사를 접한 뒤, 라벨을 벗겨 분리 배출하는 일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느 날 빽빽이 부착되어 있는 음료수 라벨을 손톱을 이용해 딱딱 소리를 내며 분리하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며 아이가 물었다.

“아빠 뭐해?”

한창 아빠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하는 아이는 비닐을 뜯어야지 분리배출을 할 수 있다는 아빠의 설명을 듣곤 냉큼 페트병 하나를 제 품안으로 가져왔다.

“나도 할래.”

당당한 선언과 함께 조막만한 손으로 비닐의 자르는 선을 뜯기 위해 애쓰는 아이의 모습에 제법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 뒤부터는 자연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빈 페트병을 분리배출하기 전 자연스럽게 라벨을 제거했다.

내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익숙해 졌다고 생각했을 때 쯤, 나와 아이의 결정적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집 청소를 미루고 미루다 집이 난장판인 상태에서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이 생겼다.

‘왜 하필 지금!’

잠깐 하늘을 탓하고 집 상황을 살폈다. 쓰레기봉투와 분리수거함에는 쓰레기들이 용암처럼 뿜어 나오고, 싱크대 안에는 몇 일간의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장난감이, 식탁에는 점심으로 배달 음식을 먹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마음은 급하고 해야 할 일은 많았다. 현재 집의 상태로는 절대 손님을 맞이할 수 없었기에 급히 청소를 시작했다.

함께 있던 아이에게 장난감 정리를 부탁하고, 다 먹은 음료와 생수통을 분리수거장으로 가져가기 위해 왜건에 넣었다. 순간 음료수병과 생수통에 붙어 있는 라벨이 보였다. 분명히 평소라면,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비닐을 땠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따라 음료수병의 라벨이 페트병에 더 꽉 붙어 있어 보였다. 하나만 떼려 해도 손님이 오기 전가지 청소를 마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생수만 있었으면 할 텐데.’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내며 라벨을 떼는 일은 이미 마음 속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어쩌면 ‘외면했다’가 맞을 것 같다. 그때, 장난감을 정리하던 아이가 다가와 왜건 안쪽을 보더니 말했다.

“아빠 이거 떼야 해. 몰랐어?”

나는 당황해서 분리수거장으로 가는 왜건을 멈췄다. 내가 급한 일 때문에 중요한 일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며, 아빠로서 아이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부끄러워하는 동안 아이가 음료수병 라벨을 손톱으로 긁으며 말했다.

“이건 원래 떼는 거야.”

딱딱.

‘원래’라는 아이의 말이 새롭게 들렸다. 나에겐 수고로움이 추가되는 일, 안 하던 것을 신경서서 바꿔 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우쭐해서 했던 변화의 행동이 다섯 살 아이에게 처음부터 배운 당연한 원칙이었다.

“그러네. 아빠가 못 봤네.”

아이에게 허둥지둥 변명을 하고 조용히 앉아 같이 라벨을 벗겼다. 비록 집 청소는 깔끔하게 못해서 손님이 집에 오고 나서 나보다 더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이에게 미래 사회에서 살기 위한 기본적인 원칙을 다시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내가 하는 행동이 큰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나 혼자 신경 쓰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별 차이가 있겠냐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곤 너무나도 초라한 나라는 개인에 대해 고민하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사회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내가 한 행동은 내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변화는 다음 세대의 시작을 작게 나마, 아주 미세하게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새로운 표준이 된다.

표준의 이동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다 무라벨 생수병을 마주쳤다. 아이가 나보다 먼저 발견하고 외쳤다.

“아빠, 이건 비닐이 없어.”

또 다시 새로운 표준 원칙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최근 라벨을 붙이지 않고 제품을 출시하는 기업이 많이 늘어났다. 소비자들도 더 이상 가격과 성능이 아닌, 환경과 사회적 관점의 가치를 소비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같은 값이면 사회적 가치를 함께 구매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라벨이 없는 제품이 상품의 표준이 될 것이다.

아이는 여섯 살이 되었고, 음료를 다 마시기도 전에 라벨을 뗀다. 나도 아이를 따라 음료 뚜껑을 따기도 전에 라벨을 떼어내며, 미래사회에 살기 위해 새로운 표준에 적응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일순간에 모든 부분에서 환경 친화적으로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표준의 각도가 변한다면 그 변화의 폭이 더 커질 것이다. 나에겐 어려운 변화였으나 다섯 살 아이에겐 쉬운 시작이었다. 기성세대의 표준을 바꾸는 것은 힘들지만, 우리 다음 세대는 바뀐 것을 표준으로 삼아 더 큰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아이가 원래 분리배출을 잘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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