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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장려상] ‘손놈’의 다짐 (이금진) 제 2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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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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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사고력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 시간 수업 주제에 맞춰 관찰, 추론, 상상 등을 펼치고, 비유와 상징을 버무려 한 편의 글을 완성합니다. 


2분기 수업 주제는 추론입니다. 아이들은 상상과 추론의 경계에서 줄다리기 하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복권 당첨번호처럼 두드러지게 번뜩이는 사유를 마주할 때도 많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추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제시된 단서들과 경험, 지식 등을 결합하여 특정 상황의 전말을 파악해보는 활동입니다. 교사는 질문을 던지고, 아이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어미새마냥 앞다투어 손을 들고 발언 기회를 달라 채근합니다. ‘전기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떨지’ 물으니, 교실은 디스토피아 세계로 변모합니다. 아이들은 유튜브를 못 보는 세상,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무용지물이 된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인 아이는 수술 기기들이 작동하지 않아 환자들이 치료를 못 받으면 어떻게 하냐며 발을 동동거립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듭니다. 평소 다른 아이들과 정반대의 관점으로 수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친구입니다. 


   “요즘 지구온난화가 문제잖아요. 전기가 사라지면 공장도 기계도 못 쓰니 지구온난화가 치유되지 않을까요? 지구한테는 힐링 찬스라고요!”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 사이로 ‘그럼 우리가 지구한테 바이러스야?’라는 볼멘소리도 들립니다. 아이들은 지구 치료 전문 의사가 되어보자며 지구 지키기 방법 찾기에 돌입합니다. 일회용품 쓰지 않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잠실에서 강남까지 걸어서 오기, 냉장고 안 쓰기, 고기 먹지 않기…. 한 아이는 “선생님, 종이컵 좀 그만 쓰세요!”라며 제게 화살을 돌립니다. 폭발하는 목소리들이 겹치는 교실은 왁자지껄 시장처럼 소란스럽습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제 목은 거북이가 등껍질 속으로 숨는 것 마냥 아래로 조금씩 꺾여 내려갑니다. 고작 10살짜리 아이들에게 환경 복원의 책임감을 지우는 데 저 역시 결백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난 겨울, 맹추위가 기승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추워지리라는 암울한 전망들이 뉴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지구온난화가 원인이라고 하지요. '극지방 기온이 오르면서 형성된 소용돌이 기류가, 제트기류를 뚫고 한반도 전역에 찬바람을 끌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올해 봄꽃들은 유난히도 빨리 고개를 내밀었지요. 지난해보다 2주나 일찍 터뜨린 꽃망울은, 그만큼 일찍 꽃비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벚꽃 없는 벚꽃 축제가 이어지고, 4월에 피어야 할 배꽃, 복숭아꽃, 노오란 산수유 꽃도 2주 이상 빨리 피었더랍니다. 뒤늦게 땅 밖으로 나온 벌들이 먹이를 찾지 못해 굶어 쓰러질까, 벌꿀 생산 농가들이 노심초사라는 말도 들려옵니다. 이 역시 지난해보다 3도 가까이 오른 이상기온 때문이라지요?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벚꽃도 '겨울꽃'이 되리라는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심난하게 합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옷차림이 제각각입니다. 누군가는 반소매를 입은 채 연신 팔을 쓸어내리고, 누군가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빨빨 땀을 흘려댑니다. 외출 전 옷을 때마다 혼란스럽습니다. 일기예보에게 배신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지구온난화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추론과 예측 능력마저도 앗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의 보복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올해 다섯 살이 된 딸은 꽃구경을 좋아합니다. 유치원으로 달려가다가도 민들레 한 송이를 보면 바로 멈춰서 한참 바라봅니다. “너는 어디서 왔니?” 말을 걸고, 함께 유치원 가자며 졸라댑니다. 바람결에 꽃잎 한 번 살랑이면 그것이 아이에게는 대답입니다. 


2050년쯤 되면 아시아인들은 물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유럽은 대빙하시기를 맞이하리라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따뜻해질 겨울은 봄꽃의 낭만도 앗아가겠지요. ‘길가에 핀 꽃’이 도시전설처럼 여겨지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편리만을 쫓던 어른들의 이기심이 아이들의 세상을 이미 앗아가고 만 것인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위 유일한 생산자는 식물'이라는, 어느 수필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동물, 특히 인간은 소비자일 뿐이지요. 그것도 아주 고약한 '손놈'입니다. 뿌리에 씨앗까지 모조리 앗아가면서 단 한 번도 정당한 대가를 치른 적 없습니다. 무한정 외상만 달아놓고 더 내놔라 꼬장꼬장 따져대며 성화이지요. 성난 지구가 축객령을 내리며 문을 닫아버리기 전에, 이제라도 알맞은 값을 치러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귀가 후 세탁실 문을 여니, 쌓아놓은 포장·배달 음식 용기들이 보입니다. 테이프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택배상자들도 눈에 띱니다. 왜 배달대행업체들은 상품마다 상자를 따로 사용하며 쓰레기를 늘릴까 불만이 차오르기도 하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합니다. 공연히 더 많은 나무들의 목이 베이지 않도록, 테이프와 주소 기재 스티커들을 하나하나 떼어 정리합니다. 고추장과 고기 찌꺼기들이 들러붙은 음식 용기들도 깨끗이 씻어냅니다. 재활용품 수거함에 두면, 창조적인 누군가는 제가 생각지도 못한 유용한 무엇인가로 탈바꿈해줄 테지요. 

서재에 들어가 보니, 잘못 인쇄된 종이들이 책상 한쪽에 쌓여있습니다. 차곡차곡 정리하여 스테이플러로 찍으니 나름대로 귀여운 빈티지 노트가 완성됩니다. 기왕 노트가 생긴 만큼 메모하는 습관도 기를 수 있겠지요. 

쓸모가 없다며 무심코 버리기보다 쓸모를 찾아주는 데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보기로 합니다.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부터 들어낸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하나하나 습관처럼 해 나가다보면 언젠가 만날 제 손자, 손녀들도 봄꽃을 누릴 수 있지 않을지, 자그마한 소망 하나 마음속에 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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