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 말없이 다가온 봄 feat: 다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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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illden / 작성일2024-04-08본문
주말이라 아침도 점심도 늦어진 날이었다. 요즘 새롭게 도전하는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었다. 얼마나 쳤을까? 배꼽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 밖을 내다보았는데 아직도 해가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강렬한 노을빛은 내게 무언가를 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시계를 보았다. 18시 05분. 창밖이 훤해서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모르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은 겨울이 제법 물러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음은 이미 다 녹아내렸고, 개구리도 몸을 일으켜 움직인다는 경칩은 닷새나 지났지만 내게는 여전히 추운 날씨였다. 매화가 만개하였지만, 겨울이 봄꽃을 시샘한다는 꽃샘추위에 롱패딩을 챙겨입고 외출하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자연스럽다.
나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아침햇살을 맞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나 해가 뜨는 것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요즘 하늘은 늘 흐리거나 비가 오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 지 집 앞의 고속도로가 안 보일 정도였다. 이런 연유로 낮 길이 변화에 대한 느낌이 그동안 약했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의 노을 덕분에 해 지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길어진 저녁 시간, 조만간 춘분이 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나는 낮이 긴 계절을 반기는 사람이다.
엄마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이 목련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매년 봄이면 나의 초등학교 목련 나무가 떠오른다. 교문에서 교실까지 거리가 꽤 되었지만, 목련을 보며 걸어가면 그 거리는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추운 바람에 따스한 햇살과 함께 커다란 하얀 꽃잎이 춤을 추는 모습은 아주 인상깊었다. 신학기 나의 설렘을 더 행복하게 해주었다. 꽃잎이 질 때가 되면 새 학년도 조금은 적응되어 있었다. 그 뽀얀 이파리는 갈색의 줄무늬를 안고 있었다. 온전히 뽀얀 꽃잎을 발견하는 날은 곱게곱게 집으로 모셔갔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나는 봄을 유난히 탄다. 여전히 나의 봄을 목련이 반겨주면 좋겠지만 요즘 내가 다니는 길의 목련은 그늘진 곳 햇살 한번 받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꽃을 제때 보기 힘들었다. 매일 지나다니며 올려다보았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꽃이 지려는 매화도 있는데, 겨울눈에서 겨우 얼굴을 내민 초록 잎을 보다가 스카프를 더 움켜쥐었다.
온갖 초목에서 싹이 올라오는 봄, 땅속에서 잠을 자던 개구리도 뱀도 동면에서 놀라 깨어난다. 서리가 이슬이 되어 한방울 또르르 흘러, 동물의 잠을 깨웠을까 재미난 상상을 해본다. 경칩을 시작으로 이제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개미도 벌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이면 여전히 영하의 날씨를 보이고 있음에도 양지바른 곳의 산수유나 매화는 벌써 만개하였다. 가끔 두 자릿수의 온도를 보이긴 하지만, 겨울이 꽃구경하려고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머문다. 꽃 피는 봄을 시샘하여 겨울이 가지 않고 막바지 추위를 보인다는 꽃샘추위를 만끽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오늘은 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햇살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고로쇠를 선물 받았다. 이 무렵의 고로쇠는 효능이 뛰어나다 해서 약처럼 해마다 챙기기도 하더라만 나는 익숙지 않은 경험이라 해마다 챙기지 못한다. 그저 냉이무침을 하고 달래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쑥떡을 해 먹는다. 그렇게 햇나물을 챙기고 춘곤증을 물려 보낼 비타민을 보충하는 것으로 봄을 맞이한다. 꽃 피는 봄이 기다려진다. 벌들의 활동도 활발해질 테다. 꽃이 만개한 나무 길을 걷노라면 붕붕 벌소리에 우리의 대화는 소통이 안 된다. 거기서만 듣고 느낄 수 있으니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벌에게 귀를 한껏 기울인다. 올해는 벌의 소리가 나의 대화를 얼마나 방해할까? 올해도 철쭉 위에, 그리고 배롱나무꽃에 얼굴을 파묻은 개미를 볼 수 있겠지? 벚꽃잎이 세상을 핑크빛으로 물들일 생각에 나의 마음은 벌써 설렌다.
글 김채은